
파라오 슬롯.태어나 보니 마주한 세상은 황량한 땅과 견딜 수 없는 추위... 안간힘으로 날개를 펄럭여 보지만 결국 나비다운 삶을 살아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얼마나 더 버텨야 봄 내음을 만끽할 수 있을까?
황해북도 봉산군 출신인 김규민 감독은 북한 사람들은 겨울에 태어난 나비 같다고 했다. 잘못된 시간과 장소에서 태어난 이유만으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따스함을 누리지못하는 삶… 김 감독은 북한 주민들의 '겨울'을 파라오 슬롯를 통해 알리고 있다.
김 파라오 슬롯은 통일이 되면 우리가 마주할 대상은 북한 당국이 아니라 주민들이라며, 이들이 어떤 아픔을 안고살아왔는지를 알아야 서로를 더 이해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변화에 대한 갈망, 그리고 '발악'
김 파라오 슬롯은 북한에 있을 때 우연히 들은 한국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부드러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난생 처음으로 듣는 그 목소리를 통해 북한이 처한 현실과 한국의 상황을 알게 됐다. 대학 진학 후에도 품었던 의문이 점점 커져만 가서 결국 자퇴를 결정했다.
1990년대 배고파 쓰러져 가는 이들을 목격하면서 끓어 오르는 반항심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각 단위에 있는 김일성혁명역사연구실을 부수기 시작했다. 안전원들이 사건 현장에 와도 '범인'을 찾지 못했고, 성공적인(?) '거사'에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오래 가지 못했다.1999년, 북한에서 지방선거 투표를 할 때 투표소를 부순 사건으로 체포됐다. 전국적인 투표 행사인 데다가 투표장에 김일성 사진이 걸려 있어서 일이 커졌다. 공개 처형이 선고됐다. 죽음 앞에서 마지막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대못을 삼켰다. 병원으로 이송됐고, 그렇게 병원에서 탈출했다. 북한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에 갔다가 2001년에 한국에 도착했다.
김 파라오 슬롯은 당시 북한 사회의 변화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다. 선전된 공산주의와 현실은 달랐고,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다. 그는 그 당시의 반항심과 일탈행동은 '발악'이었다고 말했다.

▶파라오 슬롯계서 “맨땅에 헤딩”
전국대회에 나갈만큼 어릴적부터 글쓰는 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김 감독은 무대도 무척 좋아했다. 탈북 후, 품었던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한양대학교 연극파라오 슬롯학과에 진학했다. 어느날 교수님이 직접 이야기를 쓸 수도 있고 원한다면 출연도 가능한 감독이라는 직업을 추천했다. 그때부터 감독이라는 꿈을 가지고 촬영 현장에 뛰어 들었다.
파라오 슬롯라는 세계가 자본주의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겪었다. 파라오 슬롯를 찍기 위해서는 투자를 받아야 하고, 또 그에 따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 바로 아웃되는 잔인한 곳이었다. 정글과도 같은 파라오 슬롯계에서 시작한한국 생활은 ‘정착’에 대한 고민을 할 새도 없이 바빴다.
냉혹한 현실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파라오 슬롯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김 감독은 막내 시절에 많은 실망과 회의도 느꼈지만 파라오 슬롯계를 떠날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에 파라오 슬롯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회의를 느꼈다면 아마 못 버텼을 거라고 했다. 파라오 슬롯를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을 통해 ‘아 이게 자본주의 사회구나’를 깨달으면서 한 걸음씩 적응해 나갔다.
김 감독은 파라오 슬롯를 통해 사람들에게 북한 인권을 알리고 있다. ‘사랑의 선물’이 파라오 슬롯제에 초청을 받아 상영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공감해준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한 관객이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제서야 알게 돼서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그 벅차오르던 감정을 잊을 수 없다고 김 감독은 회상했다.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는 액션 코미디에요. 사람들이 실없이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그런 파라오 슬롯요. 나중에 통일이 되면 남북한 주민들이 같이 편하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그런 파라오 슬롯를 만드는 게 제 비전이에요.”
김 감독은 파라오 슬롯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북한 주민들의 아픔을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겨울나비들의 삶을 이야기해 가고 있다.@